[기획 의도]
회복능선 위에서 꿈꾸는 ‘쫀드기’, ‘수제비’, ‘별사탕’의 연대
“한 번이라도 누군가가 나에게 잘했다고 말해줬으면 좋겠어.”
전시 준비 회의에서 탁이 무심코 뱉은 말이다. 탁은 더딘 회복능선의 어딘가에 있는 < 상(上)여자의 착지술 > 멤버이자 공식 ‘리트머스지’다. < 생존자가 직접 개발하는 회복키트 >라는 모토로 팀이 처음 시작됐을 때 그는 ‘생존자’라는 정체성으로 합류했다. 리트머스지보다는 공식 ‘실험 쥐’로 자신을 명명한 그는 팀이 개발한 프로그램의 모든 회차에 참여해 어디에 살을 붙이고 빼야 할지, 무엇에 마음이 불편하거나 즐거운지, 예민한 촉수로 말을 보탰다. 생존자로서의 고통만큼 문학계 미투의 연대자로서 여러 형태의 불링을 겪으며 생긴 상흔도 만만치 않은 그였다. 그는 ‘상처 입은 연대자’였고, 그가 견뎌온 시간은 단지 피해생존자라는 정체성만으로는 정의될 수 없는 일부 연대자들의 고단한 현실을 드러낸다. 그리고 < 상(上)여자의 착지술 >은 생존자이자 연대자라는 두 정체성을 공유하는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모인 문화예술계 내 탈장르적 미투 연대체로서, 우리는 ‘연대의 연대’, ‘연대를 백업하는 연대’를 표방하며 유쾌한 독려와 세심한 돌봄의 운동방식을 지향한다.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제도는 변화했고 성평등 교육은 강화되었으며 시민의식은 높아졌다고 누군가는 말한다. 그러나 교제살인은 어느 때보다 빈번해졌고, N번방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서울대N번방사건으로 60여 명의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가 발생했다. 2020년 N번방사건을 공론화한 ‘추적단 불꽃’의 원은지 기자는 서울대N번방사건을 다시금 우리 사회에 알리며 싸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말해주고 있다. 사회적 공분에도 처벌은 미미했던 밀양성폭력사건은 최근 피해자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유튜버들의 폭로로 잔인한 2차 가해를 다시 한 번 피해자에게 가했다.
폭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이 잔악한 연쇄고리를 멈추기 위해 연대한 수많은 이들 가운데 누군가는 내상을 입었고 누군가는 운동을 멈추거나 사라졌다. 그리고 이들이 바로 ‘연대의 연대’, ‘연대를 백업하는 연대’를 지향하는 < 상(上)여자의 착지술 >에서 건강하게 북돋고자 하는 이들이며, 이들의 모습은 지난 5년 동안 < 상(上)여자의 착지술 >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해온 우리 모습이기도 하다.
아르코 공공예술사업의 일환으로 결과공유전시 < 폭력 너머의 시선 >를 개최하며 우리는 외상은 사라졌지만 내상은 아직 선명한 우리의 속모습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세 개의 시공간이 연결된 회복능선 위에 선 생존자와 연대자, 그리고 그 어딘가를 함께 걷는 상여자들의 모습을 이번 전시 안에 담고자 하였다.
전시는 회복능선 위에서 펼쳐지는 세 개의 시공간축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사건 당시 피해자가 입은 옷, 사건 기록, 일상 소품 등을 통해 사건 이면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꺼내보고자 한 < 사건 너머 사람의 이야기 >이다. 생존자이자 연대자로서 정체성을 공유하는 < 상(上)여자의 착지술 > 멤버 세 명이 직접 겪은 사건을 토대로 하였다. 그들의 치열한 경험과 해석에서 연대의 역사가 시작됨을 알리기 위함이다. < 상(上)여자의 착지술 >이라는 팀이 지닌 정체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전시는 회복능선을 걷고 있는 생존자와 시민들의 일상이 영상으로 펼쳐지는 < 폭력 너머의 시선 >이다. 포토보이스(photo-voice) 기법을 기반으로 < 상(上)여자의 착지술 >에서 개발한 미디어 시선회복 프로그램인 < 폭력 너머의 시선 >에 참여한 참가자들은 한 달 동안 본인의 일상을 사진으로 기록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었다. 미디어의 폭력성이 우리 내면의 시선에 잠재적인 내상을 남기는 시대, 폭력의 타성에 길들길 거부한 이들의 섬세한 기록을 만날 수 있다.
마지막 전시는 생존자이자 연대자로서 정체성을 지닌 탁이 꿈꾸는 < 대기실로의 서점 >이다. 출판계 피해생존자인 탁은 처음 자신의 사건을 공론화한 이후 연대 활동을 하면서 여러 형태의 불링을 겪었다. 출판사 직원이었던 그는 현재까지도 무직인 상태. 오래도록 멈추어 있었다. 이제야 조심스럽게 자립의 꿈을 꾸기 시작하는 그는 무사히 한 서점의 사장이 될 수 있을까? 그가 꿈꾸는 < 대기실로서의 서점 >이 펼쳐진다.
교제폭력, 참사, 혐오범죄, 인재 등의 단어가 엎치락뒤치락 뉴스의 1면에 등장하며 오늘의 날 선 현실을 들추어내는 시대. 당사자 개개인의 고유한 기억을 성기고 빈 공간 안에 드러내 진실의 거시적인 형태를 형상화해 길어 올리는 ‘기억의 영토화’ 과정이 이루어질 때, 기억은 과거를 오늘로 잇고 교훈을 넘어선 성찰을 남긴다. 본 전시는 상여자 개개인의 기억을 시작으로 그것이 생존자, 시민들과 공유, 확장된 후, 다시 회복능선 위에 선 한 사람의 시선을 통해 ‘우리는 이제 어디를 바라볼 것인가’를 되묻고자 하였다. 기억하는 행위는 우리를 인간 됨의 자리로 되돌려놓는다. 우리는 국가가 주도하는 획일화된 역사 속 기념관과 박물관의 시대를 넘어, 관람객들이 자신의 기억을 반추하고 전시공간 안에 이를 써 내려가면서 다음의 기억을 함께 만들어가길 바란다.
상여자는 ‘회복능선’을 이렇게 정의한다.
‘한 개인이 지나온, 그리고 앞으로 지나게 될 회복의 여정을 드러내는 선.
오르락내리락하는 능선의 모양처럼 개인에게 맞는 회복의 정도도 각기 다르다.
직선의 상태는 경직이나 한 곳에 고착됨을 의미하기 때문에 회복의 모양과 성질은 곡선, 유연성을 내재한 다양한 능선의 형태를 띤다.
따라서 자신에게 알맞은 회복의 능선을 만들어가는 게 중요하다.’
-< 상(上)여자의 착지술 > 홈페이지
(sangyeoja.creatorlink.net)에서 퍼옴
우리는 바란다. 여성으로 태어나 이 땅에 살면서 한번은 피해자였을지 모를, 그리고 앞으로도 안 그럴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우리가 전시를 관람하는 동안만이라도 잠시나마 서로를 오롯이 위로하기를. 비대면의 시대, 대면하는 인간으로서 sns의 연대 서명을 넘어 활동에 직접 참여하고, 같은 맘으로 전시장을 찾을 누군가에게 따뜻하게 인사하기를. 그렇게 서로의 아픈 기억에 위로의 옷과 다정한 향기를 입혀주기를.
신학자 송진순은 말한다. “각자도생하며 존중이라는 이름으로 헐거운 연대를 공동체의 가치로 포장하는 길이 궁극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고. 그리고 우리는 그의 말처럼 쫀드기보다 쫀쫀하고, 수제비 반죽보다 탱글탱글하며, 별사탕보다 달콤하되 씹을수록 오독오독한 즐거움으로 힘차게 나아가는 연대로서의 꿈을, 아직 꾸고 있다.
< 상(上)여자의 착지술 >의 일원,
나무늘보 씀
*참고문헌
신혜란, 「기억과 망각의 투쟁, 기억공간」, 『참여사회』 314호. 2024: 6-9.
이범진, 「헐거운 연대로는 부족하다」, 『복음과 상황』 402호. www.goscon.co.kr
[쉬운 설명]
연대란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함께’입니다.
우리는 함께 어딘가를 가기도, 앉아 있기도 하며, 밥을 먹거나 웃기도 하지요. 둘 이상이 되어 함께 하면 그것은 연대의 조건이 됩니다. 무더위에 전시장으로 가기 위해 함께 지하철에 앉아 있거나, 좋은 공연을 같이 보면서 울거나 웃는 우리의 모든 행동은 서로를 칭찬하고 북돋는 '연대의 행동'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함께 하기로 한 사람이 아프기도 하거든요. 다리를 다치거나 마음이 아파서 더는 함께하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위로하고 도와서 다시 같이 걷길 바라게 됩니다.
< 상-여자의 착지술 >은 이렇게 함께 하는 사람들, 즉 우리가 ‘연대인’이라고 부르는 이들의 마음에 상처가 있다면 예술로 연고를 바르는 일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연고일까요?
우리는 춤을 추고, 그림을 그리고, 핸드폰으로 나만의 영화를 만들거나, 글을 쓰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 종합선물세트 같은 연고를 예술로 만듭니다. 그런 다음 상처가 있는 연대인이 자신의 상처 위에 살포시 덧바를 '예술 연고'를 함께 발라줍니다. 이번 전시는 저희가 만든 '상(上)여자 연고'를 바른 사람들이 다시금 회복의 능선을 걷기 시작하면서 드러나는 몸과 마음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전시입니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 알려드릴까요?
연고는 신기하게 맛도 난답니다. 쫀드기처럼 쫄깃할 때도 있고요. 수제비처럼 탱글탱글하고도 걸쭉한 식감이 은은하게 우러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별사탕처럼 씹을수록 오독거리는 즐거움으로 입안에서 계속 굴려보고도 싶어집니다.
전시를 보러오실 여러분에게 < 상-여자의 착지술 >은 저희가 준비한 '마법의 상(上)여자 연고'를 발라 드리려고 합니다.
자, 그러면 이제 전시장으로 "함께-" 들어가 볼까요?